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Apple II (문단 편집) == 대한민국에서의 Apple II ==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편화 된 기종은 Apple II Plus이다.[* 컴퓨터 잡지에서는 BASIC 소스 리스트를 게재하며 지원 컴퓨터로 Apple 컴패티블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기에 컴패티블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Apple의 특정 모델 이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운상가 가서 아저씨 Apple 컴패티블 하나 주세요- 하는 식. 참고로 컴패티블의 영어는 compatible로, '호환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Apple 호환기종이라는 뜻으로, 이때는 호환기종이라는 단어가 정착되기 이전이라서 그랬다. 호환기종이라는 단어가 정착된건 [[IBM PC 호환기종]]이 보급된 1990년 무렵이다.] Apple II 클론 모델들은 1983년을 기점으로 [[세운상가]]의 컴퓨터 매장에서 만들어 많이 보급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80~1982년에 세운상가에서 Apple II 클론을 만들기는 했으나 이쪽은 대부분 구형 II. 1983년이 기점이 된 이유는 그 해 [[전두환 정부]]에서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하고 [[8비트]] 컴퓨터 5종을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하여 학교에 보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5종의 컴퓨터에는 Apple II Plus 호환기종인 [[TG삼보|삼보]] 트라이젬 20이 포함되어 있었고 차후의 사업에서도 Apple II 호환기는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되어 학교에 보급했다.[* 하지만 이후 1989년도에 정부에서 교육용 컴퓨터를 8비트가 아닌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으로 공식 재지정하면서 Apple 클론 및 MSX 호환 기종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업무용/교육용/게임용으로 많이 팔린 기종 중 하나로서, 1980년대 컴퓨터 학원이 생기고 개인용 컴퓨터 붐이 일어나면서 세운상가제 Apple II Plus 클론의 보급이 늘어났다. 한국에 팔린 Apple II는 99.9999% 한국에서 제조된 클론이거나 혹은 대만산 호환 기종이었으며 오리지널 Apple II는 그 당시 거의 볼 수 없었다.[* 당시 유명했던 브랜드로는 삼보 트라이젬, 이행 사이보그, 효성 PC-8000, 그리고 정원 하트 등이 있었는데 그런 브랜드보다는 세운상가제 노브랜드 제품이 더 많이 팔렸다. 품질차이가 없으면서 가격도 더 싸고 무엇보다 저작권은 개나 주다보니 호환성이 더 좋았다. 브랜드 제품은 자사 브랜드를 어필하기 위해 Apple II Plus의 롬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약간 변형했기에 드물지만 기종에 따라 특정 게임이나 프로그램이 안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분위기상 굳이 저작권에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Apple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IBM PC의 경우 IBM이 저작권 압박을 하긴 했다. 이유인즉 Apple II 호환기종의 경우 세운상가 중소 공방이 주로 만들어 대부분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에서 소비했기 때문에 압박을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IBM PC의 경우 대기업이 주로 생산하여 수요층도 기업체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이던 소비던 개별 기업의 규모가 커서 압박이 가능했다. 당시는 베른협약 이전이라 저작권 압박을 해 봐야 얻는 것은 없었으나 IBM PC를 생산하던가 소비하는 기업체들은 '''수출'''을 주로 하는 기업도 많아서 해외 사업에 태클을 걸 수 있어 저작권 압박이 통했다.)] 역설적으로 오리지널 Apple II 시리즈는 근래 들어 한국에 더 많아졌는데 아래에 소개된 동호회에서 이베이 등을 통해 중고품을 낙찰받아 수입하기 때문. 참고로 스티브 잡스 사후 오리지날 Apple II는 이베이 시세는 이전보다 비싸진 것은 물론이고 매물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다. 당시 문교부(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가 선정한 교육용 8비트 컴퓨터 중 하나이기도 했으나 대기업에서는 대우전자 IQ-1000/2000을 필두로 하는 [[MSX]] 계열, 삼성전자의 [[SPC-1000]]/[[SPC-1500]], [[금성 패미콤]] 시리즈 등 일본산 컴퓨터의 클론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하였고 Apple II 계열은 거의 생산하지 않았다. [[효성그룹#s-7.1.5|효성컴퓨터]][*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 사업도 했으나 이후 철수하여 B2B 사업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ATM기 만드는 효성티엔에스(구 노틸러스효성)로 잘 알려져 있다.] PC-8000 같은 대기업제 Apple II 클론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드물었고 기본적으로 Apple II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 진영의 메인 기종이었다. 오늘날의 [[삼보컴퓨터]]를 있게 한 히트작 '트라이젬' 시리즈도 Apple II 호환 기종이다.[* 삼보컴퓨터의 최초 기종은 일본 샤프사의 MZ-80K/C 복제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ple II의 보급률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대기업 제품에 뒤지지 않았는데, MSX와 SPC-1000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본체(대략 30만 원 대)와 맞먹는 충공깽의 가격을 형성하여 본체만 구입하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입하지 못하는 사용자가 매우 많았지만 Apple II 클론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대략 10만 원 대 초중반) Apple II의 본체+모니터+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가격이 MSX/SPC의 본체+모니터의 가격과 비슷했다. 이는 MSX 등이 플로피 디스크의 양면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의 헤더를 채용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쓰는데 반해, Apple II의 디스크 II는 헤더를 하나만 채용한 단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라 가격이 저렴했던 것이 이유였다.[* 문제는 당시 유통된 대부분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38트랙까지만 읽어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Apple II의 디스크 II는 40트랙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드물게 용량을 꽉 채워 기록된 플로피 디스크는 읽지 못하고 헤더가 구석에서 딱딱 큰 소음만 내다가 오류가 났다. 그래서 나중에 40트랙을 전부 읽어들일 수 있는 조금 더 비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판매하기도 했다. Chinon 브랜드가 대표적.] 타 기종 소유자들이 테이프로 힘겹게 쓰고 있을 때 Apple 사용자들은 플로피 디스크로 쾌적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Apple 사용자 중에도 테이프를 쓰는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사용자도 있었고, MSX2와 컬러 모니터,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모두 소유한 아주 부유한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당시''' MSX 본체는 30만 원, 14인치 컬러 모니터 역시 40만 원 가량이었다. 게다가 대우전자에서 MSX용으로 내놓은 싱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49만 9천 원 더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79만 9천 원이었으니 가격이 실로 후덜덜해진다. Apple II 본체와 단색 모니터(Apple II의 형편없는 고해상도 컬러 기능 때문에 컬러 모니터가 사실 상 필요없었고 오히려 단색 화면이 깔끔했다.)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당시 40~45만 원 정도. 참고로 1985년 당시의 물가를 살펴보자면 '''짜장면이 500원''', 서울 지역 국공립대 등록금이 24만 원, 삼성전자 대졸 초봉이 55만 원, 독방 하숙비가 7만 원 정도, '''사립대학 평균 한 학기 등록금'''이 50~60만 원 정도, 개포동 주공 아파트 11평형이 '''1200만 원''' 정도였다. 지금 물가로 보면 당시 PC를 갖추는 비용이 얼마나 거금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많은 국민학교에서는 학부모, 특히 육성회 임원들에게 컴퓨터실 비용을 얻어냈다. 육성회장이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게 이런 이유였다.] Apple IIe/IIc/IIGS 같은 후기 모델들은 Apple II+와 달리 한국에서 그다지 흥하지 못했다. 이 기종들은 1988~1989년을 기점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Apple IIe 호환 기종은 1987년 말~1988년 초쯤 등장한 미래교역의 MR-128이 거의 유일한 모델이었고 Apple IIc 계열도 비슷한 시기에 수입된 대만제 LASER128이 있기는 했으나 양쪽 다 보급률은 그다지. Apple IIGS는 폐쇄 아키텍처라 호환 기종도 없어 소량 수입된 것 외엔 아예 정식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현재 한국에 있는 Apple IIGS 물량 대부분은 한참 지나서 애호가들이 이베이 등에서 들여온 것. 그리고 1989년엔 8비트 시장 전체에 '''[[교육용 PC 사업|재앙]]'''이 다가오고... [* 앞에서 언급했지만 Apple II와 II+는 일반적인 IC를 채용하여 복제가 무척 쉬웠다. 하지만 IIe의 경우 커스텀 칩셋을 제법 사용하여 일정 규모이상 판매되지 않는 한 칩셋을 주문제작하는게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대부분 중소기업, 아니 중소기업 수준도 안되는 세운상가 개별 점포에서 Apple II를 복제해서 만드는 분위기상 그런 칩셋을 만들기는 가성비가 안맞았다. 여기서 한국과 대만의 차이가 나오는데 삼성, 금성(LG) 같은 대기업 위주인 한국 분위기상 MSX 등을 밀었던 대기업이 있어 Apple II는 완전 중소기업만이 만들어 커스텀 칩셋 제조 의지가 없었지만 대만은 중견기업 위주라서 복제품 Apple II가 PC산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IIe용 커스텀 칩셋 제조까지 손대게 되었다. 이 대만제 칩셋이 외부 판매되어 이를 수입, 1988년 한국에서도 IIe를 만들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MSX의 위세도 높아서 시장성이 매우 약했다. ~~한 2~3년만 먼저 들어왔어도 이야기는 달랐을것.~~] MSX를 사주면 '''게임만 한다'''고 학부모들은 교육용으로 Apple II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MSX를 가진 소년들은 재믹스를 가진 친구들과 팩을 서로 빌려가면서 신나게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Apple II라고 게임을 못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은 Apple II가 더 빈약했다. MSX2나 SPC 시리즈 쪽은 제조사가 대우, 삼성이라는 당시 대기업이었고 한글이나 그래픽 지원이 좀더 원활한 덕에 제조사의 지원 하에 초중고교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이 상당수 개발되어 학년·과목별 소프트웨어가 제법 갖춰졌지만 Apple은 그런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 ~~물론 그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은 비싸서 가정용으로 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Apple에도 카멘 샌디에고 시리즈같은 오히려 타기종보다 더 질이 좋은 교육용 소프트웨어[* 진짜 교육용은 아니고 상식퀴즈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가 있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당시의 국민학생이 넘기 힘든 '''영어'''의 장벽이 있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초중반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의 군북초등학교는 총 학급수 12학급의 면소재지 학교 주제에 효성 PC-8000 40대(!)로 무장한 컴퓨터실이 있었는데, 군북면 신창리가 고향인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작정하고 밀어준 것이었다.[* 지금도 함안 조씨 문중(효성가) 재실과 고택이 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략 지금의 [[군북역]] 바로 앞.] 이 학교는 심지어 이 문서에 나와 있는 애플2 플러스 원본 기종에, 일부 MSX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군북초는 88올림픽 하던 시절에 '''전산 발매 성적표'''를 찍어내는 용자짓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도시 학교들도 죄다 선생님이 수기로 성적표에 행동발달상황 등을 기재하던 시기. 그러나 도시 인구집중 가속화로 인해 이 학교의 컴퓨터 특화사업은 8비트 시대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교육용 PC 사업이 IBM으로 넘어갔는데 조홍제 회장 타계와 함께 효성그룹 지원이 끊기면서, 16비트 IBM PC는 열악한 군 교육청 재정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덕택에 시골 학생들이지만 당시 해외기술의 총아(...)이던 컴퓨터란 물건을 만져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학생들이 있었고, 일부는 서울대학교 등을 거쳐 출연연이나 IT바닥에서 근무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